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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왕조 500년 - 조선의 건국

by been's 202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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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고려의 멸망과 동시에 탄생한 국가로써, 1392년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던 국가이다.
고려의 의지를 물려받은 것이 아닌 옛 고조선의 의지를 이어받은 국가로써 현 대한민국의 탄생을 조선의 탄생으로부터 보기도 한다. 흔히 알려진 '한국사의 시작'이라는 뜻이 이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4세기 말, 복잡한 정세 속에 흔들림 없던 명나라와 고려 간의 관계는 공민왕 왕권서부터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서서히 가던 균열은 어느 사건으로 터져버리고 마는데 바로, 우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이인임과 김의가 명나라 사신 채빈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1374년엔 친명정책을 펼치던 공민왕마저 시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명나라로부터 경계를 받기 시작한다
이미 14세기 후반들어서 고려 내에서는 친명파와 그 반대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반대파가 서서히 힘을 갖춰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 명나라는 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고 고려 사신의 입국을 막게 되며 본격적으로 고려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명에 이전부터 반감을 갖고있던 고려의 상층부는 선제공격으로 명을 쳐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나 고려의 충신이나 명장인 최영장군이 적극적인 타도 명나라를 외쳤는데, 왕득명의 일로 고려에 온 요동 병사 21명을 베어버리며 명나라에 대한 적대심을 불태웠다.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고려의 명장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침략해서는 안된다', '여름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요동정벌을 감행할 시 왜군의 침략에 허술해진다', '때가 장마철이라 무기가 녹슬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노출된다''사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다.
명에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던 최영은 이 '사 불가론'에 반박하는 3가지 의견을 내었는데,
명나라가 대국이긴 하지만 북원과의 전쟁으로 요동경비는 허술하다, 요동을 공격하면 가을이기 때문에 수확이 가능하여 군량 확보가 가능하다, 장마라는 조건은 명나라도 같다 오히려 명나라 군사들이 장마철에 더 싸우기 싫어한다는 3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감행하자는 의견을 피력한다

결국 우왕은 최영의 의견을 들어 요동정벌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이성계는 그렇게 내키지않는 원정을 떠나게 된다.
약 38000명으로 시작되어 출진당시 5만여 명의 군사와 말 21000여 필. 그렇게 요동정벌 계획은 감행된다.
군사의 총 사령관은 팔도도 통사로 승진된 최영 장군이었으며 좌군 도통수는 조민수, 우군 도통수는 이성계가 내정된다
하지만 출진당시 우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최영을 필두로 세우지 않고 자신 옆에 두며 이성계를 전선의 필두에 세운다.
군사들이 한참 북진하던 찰나 이성계가 우려하던 왜군의 침략이 현실이 되었다. 나름의 방어를 하던 고려군은 슬슬 한계에 부딪혔고, 설상가상으로 북진하던 원정군도 식량난 및 수백 명이 익사하는 등 원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에 회군을 요청하지만 우왕 및 최영은 이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강행을 명한다.

결국 우군도통수 이성계와 좌군 도통수 조민수 및 그 장수들은 전선에서 급히 동의하에 군대를 회군하는 '위화도 회군'을 결정한다.
이후 회군병력은 400km를 10일 만에 주파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마침내 6월 3일 이성계 주도하 고려사 최후의 전투가 발생한다.
전투는 의외로 일방적이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 대부분이 요점이 이성계 군에 점령되었고 마침내 궁궐마저 장악하여 혁명을 이루어냈다.

태조 이성계 어보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는 잠시 창왕에 이어 공양왕을 왕으로 앉히며 정세를 안정시켰다. 이후 1392년 공양왕에게 왕위를 이어받아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는 1393년 2월 15일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며 고려의 멸망을 고하고 조선의 탄생을 알렸다.
이렇게 조선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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